2012년 한국서예협회김해지부 봄철행사 기획을 위한
경주문화재 탐방 및 탁본 체험 사전 답사를 회원 4명이 2월 25일(토) 실시하였다.
장유에서 오전 9시 20분쯤 출발하여
약 1시간 30분만에 千年王都 경주의 관문, 경주 IC에 도착함
경주 박물관 앞에서..
박물관 상설전시장에는 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
옥외전시장으로 나누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박물관 실내 휴식실에서 잠깐 쉰 후....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통일신라 9~10세기)
두 마리의 거북이 서로 붙어 있는 비석받침으로,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나 등에는 두 겹의 거북등무늬(귀갑문)가 새겨져 있으며, 짧은 목에는 알이 굵은 구슬목걸이를 하였다.
또한 두 마리 모두 오른발을 든 채 걸어가는 모습이다. 등에는 넓게 마련한 비석 받침 자리가 있고 그 위에 따로 만든 받침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 받침 위에 세웠던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로, 그 비편은 현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숭복사는 신라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는 절로서 최치원이 지었다고 합니다.
- 성덕대왕 신종, 봉덕사의 종, 일명 에밀레 종 -
771년 작. 국보 제29호. 높이 333cm, 입지름 227cm. 원래 경주 봉덕사(奉德寺)에 있던 것을 영묘사(靈妙寺)로 옮겼다가,
1915년 8월 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완전하게 한국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종의 몸체에 새겨진 긴 명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동(銅) 12만 근으로 주조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혜공왕이 뜻을 받들어 771년(혜공왕 7)에 완성했다고 한다.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龍鈕)의 용은 사실적인 형태로 조각되었고 그 옆에 붙어 있는 음통(音筒)에는 화려한 보상화무늬가 3단으로 장식되어 있다. 어깨와 구연부에는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문양대가 돌려졌고, 구연부의 끝부분이 모서리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연꽃 한 송이씩을 배치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어깨 밑에는 보상당초문양대가 장식된 유곽(乳廓)이 4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유곽 아래로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4구의 비천상과 연화 당좌(幢座) 2개를 교대로 배치했다. (출처 백과사전)
성덕대왕 신종을 주조하는 과정에서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쳐서 주조에 성공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으나,
종의 성분을 분석한 경과 뼈의 성분 즉,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로 추측.
들어 서면 종소리를 녹음을 하여 들려 주는 데, 심금을 울리는 그 웅장한 종소리가
"에미레~ 에밀레~~"하며 들려오는 것 같다.
- 비천상 -
종의 표면에는 새겨진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에 향로를 들고 있으며
천의 자락과 보상화가 구름무늬처럼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마치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 다보탑 -
토함산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 동쪽에 있는 다보탑을 그대로 만든 것으로,
1975년 박물관을 옮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함.
- 고선사 삼층석탑 앞에서 -
경주박물관 뒤뜰 한쪽에 엄청난 무게감으로 압도하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는 데,
고선사터 삼층석탑이라 부르는 탑이다. 이 탑은 그 크기는 말할 것도 없고, 탑에서 느껴지는 힘과 위엄은
실제로 그 앞에 서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석탑을 바라보다 보면 과연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탑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는 고선사터라는 절터에 있었다.
보문단지에서 약 2km 떨어진 암곡동(暗谷洞)이라고 하는 곳, 물속에 고선사터가 있었는 데,
1975년 댐의 건설로 덕동호가 생겼고, 이로 말미암아 절터는 물속에 잠겼다고 한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나니 점심때가 넘었다.
경주의 한정식을 체험할려고 들어가니, 여기는 3~4일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한다나.
관광 성수기도 아닌 데, 장사 억수로 잘 되는 갑다.
원풍식당을 나와 산채비빔밥 메뉴로 통일, 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우선 막걸리 반되와 파전으로 식도락을 즐기기로...
(젓가락 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모두들 시장끼가 발동을 하나보다)
식당 한켠에는 여인의 몸통상이 있어 한컷했음
(난 안찍을려고 했는 데, 보기 좋다며 자꾸 사진에 담으라고 해서...)
진수성찬으로 배를 채우고.....다음 목적지로 출발.
탁본할 장소(삼릉계곡선각육존불)로 걸어서 이동하기 위해 여기에 차를 parking.
선각육존불을 찾아가는 도중에 "배리 삼릉"이 있었다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 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7,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 삼릉 소나무 숲 -
보통 소나무는 곧게 자라는 데, 이곳 삼릉주위에 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한결같이 제 멋대로 자라 운치가 더 있어 보인다.
(한여름에 산림욕하러 다시 한번 와 보고 싶다)
- 삼릉과 소나무길을 지나 삼릉계곡으로 오르는 오솔길 -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석조여래좌상, 마애관음보살상, 선각6존불, 석불좌상,
상선암마애석가여래좌상 등 신라시대의 많은 유물들을 볼 수가 있다.
경주는 정말 온 천지가 문화재로 늘려 있는 것 같다.
-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三陵溪 石造如來坐像 ) -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 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는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도 한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 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을 동여 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 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 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설명 입간판내용)
-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경북유형문화재 19호)-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불상.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보관과 함께 이 불상이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느낌이다.
이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은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속에서 출토되어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출처 : 백과사전)
처음에는 이 불상의 한 부분을 탁본하려고 하였으나,
위치가 험난하고 불상 요철이 심하여 탁본이 불가능하였다.
- 선각6존불이 새겨져 있는 전경 -
최종 목적지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앞에 도착하였다.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 2구의 마애삼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 선각삼존불입상 3구와 선각삼존불좌상 3구, 이렇게 육존불이 있으며 현재 건물지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선각된 바위면에 약 10㎝ 크기의 홈이 있어 이곳에 목조가구를 설치하여 법당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삼릉계 제3사지로 보고 있다.
바로 옆에 축대가 일부 확인되었다고 하나, 건물이 축조될 만큼의 크기는 되지 않는다.
선각삼존불좌상 앞에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옥개석편도 있다.
이 곳의 선각육존불은 다듬지 않은 자연 암반 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을 선각으로 새겼으니 조각(彫刻)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신라에서 선각의 마애불은 8세기 말~9세기 초에 조성되기 시작하는데, 경주 남산 삼릉계곡선각육존불과 경남 함안 방어산마애불(801년) 등이 대표적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육존불 앞에서 3배를 드린 후 기념을 남겼다.
좌측 바위에 새겨져 있는 3존불의 모습
왼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본존 아미타불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로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가지고
살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48대원을 세웠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단독상과 삼존상이 있는데
보통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취한다.
아미타삼존불
석가삼존불에서 약 3m 앞의 바위 절벽면에 선각되어 있는 아미타삼존불은 석가삼존불과 반대로 본존여래가 연꽃 위에 서 있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삼존 모두 원형의 두광과 복련의 연화대좌를 표현하였다
아미타여래불은 둥근 얼굴에 목에는 두 줄로 된 삼도를 표현하였고 오른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바닥은 위로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가사는 우견편단우견으로 몸에 걸쳤는데 신광(身光)은 없고 두광(頭光)만 원으로 나타나 있다.
둥글면서 벌어진 어깨는 강건한 느낌을 주면서 허리는 매우 가늘게 표현하였다.
좌우협시보살상은 각각 꿇어앉은 자세로 본존을 향하여 꽃 공양을 하고 있는 자세이다. 형태로 보아 활짝 핀 연꽃으로 보인다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어깨에는 얇은 천의를 걸쳐 있으며, 천의자락이 나부낀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상은 여래쪽으로 향해 윤왕좌(輪王座 ;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법)로 앉아 꽃 쟁반을 들었고 오른쪽 팔 아래에 천의 자락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반대 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 쟁반을 들고 있다.
본존여래가 앉아 있고 협시보살들이 서 있는 예는 보통 있지만, 여기에서처럼 여래가 서 있고 보살들이 앉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생전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많이 부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죽으면 아미타 여래가 보살들을 데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으러 지상으로 하강한다. 그때 여래는 서고 보살들은 앉는데 이러한 모습을 내영아미타상(來迎阿彌陀像)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바위면의 삼존상은 내영아미타상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석가여래는 현세의 부처님이시고 아미타여래는 극락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이시다. 아미타여래는 지상에 하강하여 석가여래로부터 생명을 인계받는다.
이곳에 석가삼존과 내영아미타삼존이 함께 새겨져 있는 것은 이승에서 저 세상인 극락세계로 생명이 인계되는 중요한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불상의 제작시기는 이상주의적인 양식이 성행하던 8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협시 대세지보살>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협시보살이다.
지혜의 광명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힘이 크다고 하여 대세지라고 한다.
<좌협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음성을 듣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주므로 관세음,
즉 모든 현상을 두루 관찰하듯이 중생의 구제를 자재하므로 관자재, 모든 소리를 두루 듣기 때문에
원통대사라고 한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하면 중생이 갖가지 고난을 당할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중생을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복덕을 얻게 해준다고 하였다.
보통 관세음보살은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협시하는 보살로
머리의 보관에는 아미타화불이 새겨져 있고, 손에는 보병이나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측 바위에 새겨져 있는 3존불의 모습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석가삼존불
본존 석가여래는 넓은 연꽃 위에 앉아 계시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본존의 양 옆에 서 있다.
석가여래상은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큼직한 육계에 얼굴은 원만하고, 목에는 三道를 두 줄의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법의는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가사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인(說法印)이며 왼손은 무릎 위에서 손바닥을 펴 배 앞에 댄 선정인(禪定印)이다
왼쪽의 문수보살은 바위 표면의 절리로 인해 마멸이 심하여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나 연꽃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천의(天衣)자락을 잡고 있는 듯하며 얼굴은 여래쪽으로 돌리고 있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두광을 갖추고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오른손은 들어 손등을 위로 하였고 왼손은 늘어뜨려 군의자락을 가볍게 잡고 있다. 두 발은 발꿈치를 중심으로 좌우로 향하고 있다. 상반신은 나체이며 군의를 입고 있는데 허리 아래에서 띠로 묶었다.
두 보살은 모두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걸고 팔과 손목에 팔찌를 끼웠을 뿐 상의는 입지 않았다.
두 보살이 여래쪽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있음으로 바위 분위기는 아늑하게 표현되어 있다.
※ 문수보살은 부처의 지혜를, 보현보살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한다
탁본을 위해 작업에 들어 갔다.
관광객이 어찌나 끊임 없이 많이 오는 지, 처음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모두들 작업을 하기로 마음 먹고 개시를 하였다.
처음에, 바위에 물을 뿌리고...
다음에는 바위에 화선지를 붙혔다.
다음에는 바위에 붙은 화선지 위에 먹물을 뭍힌 톱밥 주머니로
볼록한 부분을 톡 톡 두들겨 나가니 윤곽이 드러났다.
부처님 발 부분이다. 야호 ~~~성공이다 !!!
좌측 불상의 발 밑에 놓여있는 연꽃 무늬를 탁본하는 광경.
처음 해 본 것이라 솜씨가 서툴렀고 준비 사항도 미흡했다.
날씨도 좋아야 하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도 작업을 할 수가 없다.
또 한여름에는 바위의 열기로 화선지가 너무 빨리 말라 작업이 어렵다.
화선지도 전통한지(닥종이)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험많은 지부장님의 코치로 나름대로 성과물을 가져올 수가 있었다.
여러분 ! 정말 수고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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