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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 申欽

운산(雲山) 2011. 12. 28. 16:50

 

퇴계선생의 평생 화두였다는 신흠선생의 시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가면서도 항상 음악을 품고 있고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하지 않고

버들가지는 백번을 꺽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신흠(1566~1628)은 학문이 깊고 강직했던 송기수(宋麒壽)의 외손자였는데, 그 모친의 품 안으로 큰 별이 들어온 다음날에 출생했다.

 그리고 신흠은 자라서 역시 학문이 깊었던 청강 이제신(淸江李濟臣)의 사위가 되었다.

 신흠이 어릴 때 과거 공부를 위해 널리 개인 훈장을 구하는데, 하루는 밤에 한 노옹이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일러 주었다.

 “과거 공부를 하려면 수춘현 우두평(壽春縣牛頭坪)에 사는 아무개 학자에게서 수학해야 하느니라.”

 이튿날 신흠은 노옹이 일러 준 대로 춘천으로 내려가서 우두평을 찾아가니, 텅 빈 황야에 인적이 드물어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살피며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어디에서 한 노옹이 나타나기에 물었다.

 “어르신, 혹시 아무개 학자분을 아시면 만나게 해주십시오.”

 “오 젊은이, 내가 그 사람인데…… 나를 왜 찾소?”

 “예 스승님, 소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과거 수업을 받으려고 합니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해서 노옹은 자기 집이 좁고 누추하니 신흠의 집으로 가서 가르치겠다고 했다.

 신흠은 집으로 돌아와 그날부터 이 노옹을 개인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과거 공부에 관한 지도를 받았는데, 그 결과 몇 년 후에 과연 대과에 급제하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대과에 급제한 신흠이 노옹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지난날의 꿈이 기이하여 이렇게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학문이 깊으시면서 과거를 보시지 않고 어찌 초야에 묻혀 사십니까? 무슨 곡절이 있으신 게지요?”

 이에 노옹은 자세를 고치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도련님, 나는 사람이 아니고 죽은 혼령입니다. 어릴 때 정신을 차리지 않아 기회를 놓쳐서 끝내 50여 년 동안 급제하지 못하고 살다가, 아내로부터 무능력자로 지목되어 ‘둔수재(屯秀才)’란 괄시를 받아 울화가 치밀어 죽었답니다.

 그래서 한이 맺혀 명부(冥府)에서 알아보니, 도련님은 높은 가문의 적복(積福)으로 반드시 대과 급제하여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도련님의 덕을 빌어 평생 잘못된 내 죄를 보상하고,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대과 급제는 오로지 자기 노력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하려고, 비록 혼령으로서나마 도련님의 스승이 되기 위해 현몽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말을 들은 신흠이 크게 놀라며, 곧 집을 나서 우두평으로 내려가 노옹의 집을 찾으니 그 부인이, “남편은 늘 나에게서 둔수재란 괄시를 받고 살았습니다.

 3년 전에 사망했으나 비용이 없어서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집 뒤에 빈(殯)을 만들어 놓은 채 있습니다.

 남편은 죽으면서, ‘내 평생 청운에 오르지 못해 박대를 받았으니 죽어서 능력을 보여 주어 당신에게 복을 끼쳐 주겠다’고 말해, 지금껏 희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신흠은 노옹의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그 부인을 구제해 주었다.

 이러니 신흠의 문장이 뛰어난 것은 노옹의 신조(神助)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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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欽 :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