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 창녕(昌寧), 이름 : 식(植), 호 : 남명(南冥), 자 : 건중(楗仲),
시호 : 문정(文貞), 활동분야 : 문학(文學), 주요저서 : 《남명집》
선생의 증조부 생원 안습공(安習公)때 삼가판헌에 처음 살게 되었다.
선대부(先代夫) 판교공(判校公) 언형(彦亨)께서 이씨의 가문에 장가들
므로써 지금의 삼가(三嘉) 토동[兎洞]에 살게 되었다.
혹은, 산해(山海),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명선생의 증조부 생원 안습공(安習公)때 삼가판현에 처음 살게 되었다.
선대부 판교공(判校公) 조언형(曺彦亨)께서 인천 이씨(李氏仁川) 가문에 장가를 들게 됨에 따라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 : 지금의 삼가면 외토리) 외가에서 태어나서 이곳 삼가면 하판리 마쟁(마재이)에서 살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이 폭포를 보면서 기개(氣槪)를 길러오던 터라, 황계폭포(黃溪瀑布 : 용주면 황계리)가 있는
병목(幷木 : 지금의 대병면)을 자주 찾은 까닭은 절친한 벗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남명선생이 만나러 다닌 벗은 다름 아닌 사미(四美) 문경충(文敬忠) 이다.
사미선생는 1494년생으로 남명선생보다 7살 위였다. 요즘 관습으로는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당시는 7살 정도 차이면 벗으로 지낼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죽마고우(竹馬故友)에 견주기보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문(句文)처럼, 바로 “먼 곳에 있어도
찾아주어 반갑게 하는 이들”이 바로 벗들이라는 것이다.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리따운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더 애틋하였기에 사미정(四美亭 : 대병면 대지리) 가는 길을 남명선생의 말(馬)이 알고 있을 정도로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
남명선생은 사미(四美) 문경충(文敬忠)을 만나려 뇌룡정(雷龍亭 : 삼가면 외토리)에서 말을 타고
간혹, 용계~두모~하판~지동~음실~공암~높은터~장전~황계~황계폭포~택계~한정울~장단~양리를 거쳐
병목(幷木) 역펑으로 사미선생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개(氣槪)를 중시한 남명선생은 집으로 돌아갈 적에도 역시 왔던 길로 되돌아
황계폭포 쪽으로 했어 토동(兎洞)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시기에 선생은 토동(兎洞)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당시(1586년 가을)에 남명선생은 사미(四美) 문경충(文敬忠), 입재(立齋) 노 흠(盧欽), 노파(蘆坡) 이 흘(李屹),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경부(敬夫) 김우굉(金宇宏) 등 인근의 여러 벗들과 제자와 함께
황계폭포에 소풍「탁계집(濯溪集)」을 가서 황계폭포와 관련한 작품 2제 4수를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남명집(南冥集)』저서에 수록된「황계폭포 : 黃溪瀑布」2수와
「유황계증김경부 : 遊黃溪贈金敬夫」2수가 바로 그것이다.
황계폭포 작품 1은 황계폭포 자체로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라면,
2의 작품은 황계폭포 주변의 경치로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이 황계폭포, 작품 2수로 남명선생의 정신 의식세계를 더듬어 보자.
작품1)
투벽환희학소수(投璧還爲壑所羞)
석전옥부회유(石傳玉不會留)
계신사용왕욕(溪神事龍王欲)
조작명주허진수(朝作明珠許盡輸)
구슬을 던지는 것이 도리어 골짝에 부끄럽네,
암벽에 전하는 싸라기 구슬 머물러 있지도 않으니,
계곡의 신은 일에 게으르나 용왕이 하고자 하여,
아침에 만든 명월주를 다 싣고 가도록 허락 한다네.
작품 1)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폭포수(瀑布水)를 게으른
계곡신(溪谷神)과 부지런한 용왕(龍王)과의 대비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계곡의 신(계신 : 溪神)을 『도덕경 : 道德經』에 보이는 곡신(谷神)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노장적인 세계에 경도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계곡과 관련된 것은‘골짜기(학 : 壑)’와‘암벽(석 : 石)’이라 할 것인데
구슬로 비유된 물은 조금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내린다.
이것은 계곡신(溪谷神)인‘계신(溪神)’보다 물의 신(神)인‘용왕(龍王)’이 부지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용왕은 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물을 멀리하여 살아갈 수 없으므로
예로부터 물에 대한 신앙으로 용왕을 섬겨왔다.
이것을 인식한 선생은 고착적인 계곡의 신을 부정하고
역동적인 물의 신에 눈길을 돌리면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물을 모두 실어가도록 허락한다고 했다.
그것도 아침에 만든 빛나는‘명월주(明月珠)’같은 물을 말이다.
작품2)
현하일속사우진(懸河一束瀉牛津)
주석번성만곡민(走石飜成萬斛珉)
물어명조무이박(物議明朝無已迫)
탐어수석우어인(貪於水石又於人)
강을 달아맨 듯한 한 줄기 물이 우진에 쏟아지니,
구르던 돌이 만 섬 옥으로 변하였다네.
사람들 논의가 내일 아침엔 그리 각박하진 않겠지,
물과 돌에 탐을 내고 또 사람에게 탐을 냈으니.
작품 2)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수로 인해
소멸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하늘에서 바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고 스승은 생각했을 것이다.
구르던 돌이 만 섬의 옥으로 변한 것이라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 힘과 그 넉넉함, 그리고 자연에의 탐구로 내일 아침엔 사람들의 의논이 그리 각박하진 않을 것이라고.
여기서 스승은 중요한 개념 둘을 떠올렸다.
4행에 보이는‘수석(水石)’과‘인(人)’이 그것이다.
‘수석’은 자연에 다름이 아니며, ‘인’은 인간에 다름이 아니다.
남명선생은 항상 이 자연과 인간을 탐구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이 같은 세계에 대한 태도는 황계폭포에 와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즉 자연을 감상하면서 인간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논의가 각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자연을 통해 인간의 정서가 순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은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 앞에서 자신의 기개(氣槪)를 길렀을 것이다.
깍아 지른 벼랑위에서 지축을 흔들며 떨어지는 그 물소리를 통해,
혹은 바위에 갇혀 출구를 찾는 그 웅장한 물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기개(氣槪)는 현실의 부조리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서 혼탁한 시대와 부대끼며 우리에게 지성의 항거를 들려주었던 민족적 의식과 같다.
그는 역겨운 현실에 대한 거부를 「폭포(瀑布)」라는 시(詩)를 통해 강하게 표명한 바 있다.
남명선생의 작품 「황계폭포」가 현실과 일정한 맥을 대고 있다는데서
함께 두고 읽어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또한, 유황계증김경부(遊黃溪贈金敬夫) 2수는
황계폭포에 같이 소풍 왔던 경부(敬夫) 김우굉[(金宇宏 : 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에게
지어준 즉석 시(詩)이다.
작품 1)
노부두면기상건(老夫頭面己霜乾)
늙은이 머리에 벌써 서리가 말랐는데
목엽황시상득산(木葉黃時上得山)
나뭇잎 물들었을 때, 산에 올랐오니
쌍백유지가간허(雙栢有枝柯幹浩)
두그루 잣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좋으니
막언정제수지란(莫言庭際秀芝蘭)
뜰에 지초와 난초 빼어났다고 말하지 마소.
작품 2)
막한추용담갱소(莫恨秋容淡更疏)
:가을 경치가 조촐하다고 한스러워 말라.
일춘류의미전제(一春留意未全除)
봄이 남긴 뜻 아직 모두 가시지는 않아는 리라.
천향만지훈생비(天香滿地薰生鼻)
하늘의 향기가 땅에 가득 차, 그 향기 코끝에 돋아 나네.
십월황화금불여(十月黃花錦不如)
10월의 국화꽃에는 비단도 비교가 되지 못할 것이리라.
※ 김우굉[(金宇宏 : 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본관은 의성(義城),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개암(開岩)으로
삼척부사(三陟府使) 김희참(金希參)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경북 성주(星州)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52년(명종 7) 진사시(進士試)에 수석 합격하였고,
1566년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사초(史草)를 기록하는 정9품.]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기 전에는 수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려 승려(僧侶), 보우(普雨)를 탄핵하기도 했다.
관직으로는 예조 좌랑·지제교·정언·헌납·부수찬·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쳐 1579년 승지, 1582년 충청도 관찰사·부제학·형조 참의를 지냈다.
1583년 유생 박제(朴濟)의 탄핵으로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 부사·광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남명 조식선생과 퇴계 이황선생의 문인으로 그의 아우는 문인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면
남명 조식선생의 외손서이다.
저서는 《개암집(開巖集)》이 있으며, 경북 상주(尙州),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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