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꽃의 변신
-제8회 지리산문학제를 앞두고-
지리산문학회장 권갑점
아주 작은 마을, 사람들의 귓속말이 잔잔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해마다 여름이 지나가고 서늘한 초가을 바람이 기분 좋게 오면 불어오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간밤에 태풍이 있었다는데 숲의 안녕이 궁금해 상림으로 달려갔다.
낯익은 여성이 열심히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연못에는 누가 봐도 아주 독특한 형태를 가진 커다란 접시모양의 잎사귀가 떠 있었고 하얀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슬쩍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꽃을 공들여 찍고 있었다.
“저 꽃이 바로 빅토리아 꽃이랍니다. 낮에는 하얀 꽃으로 피었다가 저녁이면 보랏빛으로 귀한 왕관의 자태를 나타내지요”
그녀는 궁금한 나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하얀꽃이 어떻게 보랏빛으로 바뀐단 말인가? 좋다. 오늘밤은 만사를 제쳐 놓고 꽃잎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리라’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함께 산책을 하던 후배가 연못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나도 후배를 따라 뛰었다.
“아니! 아니! 저럴 수가!”
아침에 보았던 흰 꽃이 근엄하고도 몽환적인 보라색을 머금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연못 위로 빛이 스칠 때마다 중세 시대의 후작 부인처럼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빅토리아 왕관을 향해 수많은 카메라들이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고 어둠까지도 검은 침묵이었다.
소리를 내면 마치 꽃봉오리가 사라지는 마법에 걸린 아이처럼 숨도 쉬지 못했다.
아! 이제야 알겠다. 몇 년 전부터 이 고을에 은밀히 진행되어 온 경건한 종교 의식처럼, 사람들은 꽃의 만개를 숨죽여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의 하얀 꽃이 저렇게 변하다니...’
그랬다. 꽃잎 색깔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피었던 하얀 꽃잎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래로 쳐지고, 꽃봉오리 속 보랏빛 수술과 암술이 밖으로 나오면서 흰 꽃잎을 덮은 것이다.
비는 내리고, 사진작가들은 밤의 정령들처럼 침묵으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배경이 더 신비스러웠다. 나는 멀리서 온 사진작가에게 내 우산을 펼쳐 주었다. 팔이 아팠지만 숭고한 찰나를 옮겨놓는 사진기의 비를 내가 막아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가진 것처럼.
나도 꽃 앞에서 침묵에 보탬이 되는 말 이외는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왜 빅토리아라고 이름 주었을까? 왕관처럼 생겨서?‘
나는 가만가만 빗줄기처럼 다가오는 친구가 생각났다. 삼년 전 캐나다 록키 산맥을 따라 여행을 함께 한 친구는 지금도 빅토리아 섬에 살고 있다. 그녀는 20년 전 한국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였다. 어쩌다 남편과 이혼을 하자 딸 둘과 함께 그녀는 한국사회에서 떠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교사가 왜 이혼을 했느냐?”
죄인 취급을 받았다.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린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캐나다로 갔다. 왜 하필 빅토리아 섬이었을까?
물론 그녀의 농담이었겠지만 이유가 뚱딴지 같아서 함께 웃었었다. 빅토리아 여왕처럼 살고 싶어서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고 집안에서 내 몰린 그녀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을 가서 열심히 살았다. 치과 간호보조를 일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머리에 왕관을 얹어준 사람이 나타났다. 외국인 남편은 자상하고 성실했다. 깊은 상처가 있는 그녀에게 생일맞이 치유여행지로 로키산맥을 추천했단다.
“한국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먼 이국땅이지만 뿌리를 내린 삶이 얹어주는 왕관을 쓴, 당당하게 변신한 그녀는 여왕처럼 아름답게 웃었다.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간직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꽃을 피운 아름다운 변신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저 고고한 빅토리아 꽃을 보며 생각은 잠시 멀리 다녀왔다.
그렇다.
이 조용한 고을에 또 하나 화려하게 변신한 꽃들이 피고 있다.
이번 주말 전국에서 온 시인들의 반란, 그 중 오랜 기간 동안 시를 써 온 최치원 신인 문학 당선자의 시 <꽃의 체온>은 작은 마을을 이미 뜨겁게 달구고 있다.
당선자의 머리에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처럼 화관을 얹어 드리며, 그 동안 잠자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써 온 시인을 축하 해 줄 참이다.
‘큰 소리로 말하면 보랏빛 꽃잎이 떨어질까?, 큰소리로 말하면 지리산 시인들의 영감이 떨어질까?’
벌써부터 작은 고을의 천년숲에는 가을 단풍이 소곤대기 시작한다. 그 소곤대는 바람결에 읽는 시 한편의 체온이 점점 보랏빛 감동으로 붉어 온다.
-제8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수상작 <전비담의 “꽃의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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