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함양'

역사속의 청렴 인물 - 옥계 노진

운산(雲山) 2013. 3. 20. 01:11


청백리 옥계 노진은 임금(선조)이 예조판서의 벼슬로 불렀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소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중인 모친 곁을 떠날 수 없다하여 부임치 않은 인물입니다.


옥계 노진 뿐만 아니라 그의 증조부 노숙동, 부친 노우명 역시 <함양군지> 조선조 명현편에 이름 오른 인물입니다.

증조부인 노숙동은 세종때 집현전에 선발된 학자였으며 부친 노우명 역시 현릉참봉을 지낸 청백리입니다.


옥계 노진은 1518년 함양군 지곡면 개평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시호는 문효(文孝)입니다.

1537년 생원시와 154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명되었습니다.


지금도 함양에는 옥계 노진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서원, 정자, 비석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노진의 나이 28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을사사화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는데 그 중 노진의 벗들이 많았습니다. 여러 벗들이 을사사화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노진은 사회에 몸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옥계 노진은 문학에 일찍 성취하여 그 명성이 대단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의 정진에 노력했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두 번이나 사관에 천거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벼슬살이 30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고 외직에는 오직 네 번 목사와 군수가 되었고, 두 번 감사가 되었습니다.


내직에 있을 때는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고 외직에서는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한 청백리였습니다. 또한 그는 벼슬과 속세의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었으며 모친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노진은 『부교리로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순수하고 학식이 있었다. 천성이 효우하도 자품도 뛰어났다. 학문의 공력이 있어서 사람을 성실하게 대우했고 임기응변의 지혜가 있었다. 윤춘년이 그와 사귀고 싶은 뜻이 있어서 시험 삼아 시사를 가지고 물었더니, 노진이 일부러 틀리게 답하였다. 윤춘년이 노진은 지식이 없어서 취할 사람이 못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진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노진이 ‘만일 내가 답을 잘하면 후일에 반드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의 뜻은 소인과 사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 그의 식견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명종 15년 7월 3일 정묘조)



『노진은 성품이 온화하고 장중하였으며 지조가 확고하여 간신들이 권병을 천단하던 때를 당하였지만 한번도 행적에 물들지 않았고 벼슬살이도 청렴하고 근실하게 하였으므로 상이 특별히 포상을 내려 아름답게 여겼다. 그는 관리의 사무에도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김계휘가 영남 지방을 안핵하면서 그가 행한 공적을 조사해 보고 감탄하기를‘덕행과 문학에다 관리의 사무까지 이처럼 통달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은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으며, 뒤에 문효(文孝)란 시호를 내리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시호를 받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1년 8월 1일 경진조)


노진의 들에는 밭이 없고 도성 안에는 집이 없었습니다. 30년이 넘는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항상 가난하여 쓸쓸한 객사에서 담요 한 장 변변한 것 덮지 못하고 지냈으며 손님이 와도 넉넉한 술상 한번 내지 못했습니다.  일찍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각종 돈과 재물에 대한 부정부패와 뇌물의 유혹이 옥계 노진에게도 있었을텐데, 그런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백성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모친에의 효행에 끊임없이 힘쓴 노진.


세속적인 출세나 벼슬 욕심에 그는 전혀 매이지 않았습니다.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고 산속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도 할 수 없이 세상에 나가야 할 때에는 모친을 항상 모시고 다니며 벼슬살이를 했습니다.


- 1994년 7월 4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풍천노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옥계(玉溪) 노진의 신도비로 1631년(인조 9) 임금이 하사한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건립되었다. 크기는 비의 높이 328㎝, 비신(碑身)의 높이 185㎝이고, 이수의 크기는 높이 78㎝, 너비 175㎝이다. 비두(碑頭)에는 구름 사이로 용 6마리가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이수 아래 좌대(座臺)의 정교한 조각이 돋보인다. 비명(碑銘)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선조(宣祖)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의 서체로 썼다. 노진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를 시작으로 예조·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공사(公私)가 분명하고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