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고향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경남 함양입니다.(함안이 아닙니다)
옛부터 함양은 산청, 거창과 함께 서부경남의 대표적 오지로 꼽혀 왔지요.
어릴 때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온 후로 고향을 갈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더러 고향갈 일이 있어도 볼일만 보면 곧장 돌아오곤 해서 늘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업무차 고향엘 들렀다가 볼일을 본 후 고향친구를 만나 하루저녁 묵고왔습니다.
이번 역시 주마간산격으로 보고온 고향이지만 고향을 그리며 몇 자 적어두려고 합니다.
<도천리 마을 입구 안내석>
하준수(河準洙, 1921~1955).
그는 하준수라는 본명보다는 남도부(南道富 혹은 南到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진양 하씨 집안사람으로,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도천리는 이 지역 토속어로는 ‘우루목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어릴 때 우리 동네엔 이 마을에서 시집온 우루목띠기(댁)이라는 택호를 가진 분이 있었다.
나는 하준수와는 같은 고향사람으로, 그의 마을과 우리 마을(평정리)은 3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열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도회지로 이사를 나온 탓에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시절에 들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이름이 바로 ‘하준수’인데,
나는 그가 신통한 능력을 가진 출중한 인물이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또 나는 한동안 하준수의 고향이 도천리가 아니라 그 북쪽에 있는 송평리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하준수의 고향이 송평리가 아니라 도천리라는 것을 알게 됐고,
마침 하준수의 집 맞은편에 고향집을 둔 고향선배의 안내로 하준수 생가를 둘러보게 됐다.
<마당에 잡초가 무성한 채 폐허가 된 하준수의 생가>
그의 생가는 한 마디로 폐허, 그 자체였다.
사람이 떠나고 없는 빈집은 흔히 이런 모습이겠지만, 그 모습은 참담했다.
인적이 끊긴지 오래돼 문고리는 녹슬어 있었고, 마루 천정엔 거미집이 쳐져 있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흙벽이 온통 틑어진 채 도배지로 사용한 신문지가 빛바랜 모습이었다.
대낮이었기에망정이지 어느 구석에선가 귀신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본채 마루엔 ‘하홍수(河洪洙)’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는데, 그는 하준수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이 일대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교장으로 퇴임한 선배의 부친 하동현씨(82)씨.
그 분은 종친인 하준수 집안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 편린 몇을 이날 내게 들려주셨다.
하준수의 부친 하종택은 면장 출신으로 천석꾼 부자였다고 한다.
하준수의 생가는 지금은 본채와 부속 건물 하나가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나
원래는 기와집 열 두 채로 이뤄진, 450평 규모의 큰 집이었다고 한다.
함양 같은 산골지역에서 이 정도의 집을 갖고 있었다면 큰 부자였다고 할 수 있다.
옛부터 함양은 산청, 거창과 함께 서부경남의 대표적 오지로 꼽혀 왔지요.
어릴 때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온 후로 고향을 갈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더러 고향갈 일이 있어도 볼일만 보면 곧장 돌아오곤 해서 늘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업무차 고향엘 들렀다가 볼일을 본 후 고향친구를 만나 하루저녁 묵고왔습니다.
이번 역시 주마간산격으로 보고온 고향이지만 고향을 그리며 몇 자 적어두려고 합니다.
<도천리 마을 입구 안내석>
하준수(河準洙, 1921~1955).
그는 하준수라는 본명보다는 남도부(南道富 혹은 南到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진양 하씨 집안사람으로,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도천리는 이 지역 토속어로는 ‘우루목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어릴 때 우리 동네엔 이 마을에서 시집온 우루목띠기(댁)이라는 택호를 가진 분이 있었다.
나는 하준수와는 같은 고향사람으로, 그의 마을과 우리 마을(평정리)은 3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열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도회지로 이사를 나온 탓에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시절에 들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이름이 바로 ‘하준수’인데,
나는 그가 신통한 능력을 가진 출중한 인물이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또 나는 한동안 하준수의 고향이 도천리가 아니라 그 북쪽에 있는 송평리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하준수의 고향이 송평리가 아니라 도천리라는 것을 알게 됐고,
마침 하준수의 집 맞은편에 고향집을 둔 고향선배의 안내로 하준수 생가를 둘러보게 됐다.
<마당에 잡초가 무성한 채 폐허가 된 하준수의 생가>
그의 생가는 한 마디로 폐허, 그 자체였다.
사람이 떠나고 없는 빈집은 흔히 이런 모습이겠지만, 그 모습은 참담했다.
인적이 끊긴지 오래돼 문고리는 녹슬어 있었고, 마루 천정엔 거미집이 쳐져 있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흙벽이 온통 틑어진 채 도배지로 사용한 신문지가 빛바랜 모습이었다.
대낮이었기에망정이지 어느 구석에선가 귀신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본채 마루엔 ‘하홍수(河洪洙)’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는데, 그는 하준수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이 일대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교장으로 퇴임한 선배의 부친 하동현씨(82)씨.
그 분은 종친인 하준수 집안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 편린 몇을 이날 내게 들려주셨다.
하준수의 부친 하종택은 면장 출신으로 천석꾼 부자였다고 한다.
하준수의 생가는 지금은 본채와 부속 건물 하나가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나
원래는 기와집 열 두 채로 이뤄진, 450평 규모의 큰 집이었다고 한다.
함양 같은 산골지역에서 이 정도의 집을 갖고 있었다면 큰 부자였다고 할 수 있다.
<형태만 겨우 남은 본채 모습>
<마루엔 낡고 녹슨 뒤주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준수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에선 지금도 여전히 ‘금기의 인물’이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으로,
흔히 하는 말로 빨갱이요, 좌익분자요, 공산주의자인 셈이다.
그런 활동을 한 혐의로 그는 총살형을 당했고, 처형 직전엔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함양 사람들은 도회지로 나가면 대개 인근 진주나 부산으로 많이 나간다.
(* 우리집안은 일가가 대구로 나왔는데,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하준수도 진주로 유학을 가 거기서 진주중학교(진구고 전신)을 다녔는데,
진주중학 재학중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을 당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주오(中央)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일제의 학도병에 강제로 징집되었다.
당시 일제는 학도병은 ‘지원제’인 양 선전했지만 사실은 강제 징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학도병 강제징집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학도병 징집을 거부하고는 인근 지리산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학도병 거부’ 동지 100여명을 규합하여 ‘보광당’을 조직하였는데,
혹자는 이 보광당 조직이 빨치산의 원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의 병역기피가 사회적 논란이 되듯 지금은 병역기피는 범죄이다.
그러나 일제말기 그들의 학도병 징집 거부(기피)는 일종의 항일투쟁이었던 것이다.
<하준수의 생전 모습>
그는 부잣집 아들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이른바 부르조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되지 않고 이후 투쟁적 삶을 살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일제말기 학도병 거부에서부터 사상적 모태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그는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함양군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남로당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당시만해도 그는 온건론자였던 것 같다.
하동현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한민당 소속 장인(이민종)의 소개로 잠시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리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이내 그만두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그는 민족적 기치를 내건 북쪽 세력의 정책에 경도되기 시작했으며,
1949년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자 제3병단 부사령관을 맡아 태백산 일대에서 유격대를 지휘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태백산, 일월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였으며,
휴전 후인 19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돼 이듬해 여름 총살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해방공간에서 그와 같은 인텔리 가운데 이념의 희생자가 된 자가 적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린 사람은 학도병 출신의 소설가 이병주였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하준규는 하준수를 모델로 하여 쓴 것으로,
이 소설이 널리 읽히면서 하준수도 일반인들에게 비로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그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함양 출신의 소설가 노가원씨.
노씨는 <남도부>라는 소설집을 통해 하준수의 삶을 다시 재조명했다.
이현상에 대한 연구는 이미 나왔으나 하준수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아직 없는 것 같다.
<함양군청 청사>
그간 서부경남의 오지 중의 오지로 꼽혀온 함양은 청정한 환경으로 전국에서도 손꼽을만하다.
또 곳곳에 산재한 정자, 향교, 서원, 사당 등으로 선비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된 곳이기도 하며,
함양은 특히 한국전쟁 전후 이념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하준수의 생가를 정비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흥부놀부나 홍길동, 심청 같은 전설적 인물들도 캐릭터로 만들어 지역홍보를 하는 마당에
우리 현대사에서 활동했던 실존인물의 삶을 재조명하는 자체는 나쁠 것은 없다고 본다.
함양군 당국은 물론 함양 지역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보길 기대한다.
미국서 발견한 하준수 명의의 '원호증'.. 소설가 박도 선생 제공
서울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몇 년 전에 후진을 위해 용퇴하신 후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소설가 박도 선생님께서 위 글을 보시고 남도부(하준수)관련 귀한 자료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활동하고 계시는 박 선생님은 수 년 전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의 행적을 찾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엘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현지에서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 근현대사 관련 귀한 자료를 다수 입수하셨으며, 나중에 이를 책으로 엮어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오늘 오후 제게 전화를 걸어와 ‘동해남부전구빨치산사령관 남도부’ 명의의 ‘원호증’ 자료 사본을 입수해 갖고 계시다며 메일로 제게 보내주셨는데, 위 사진이 그것입니다. 그 내용은 빨치산 대원들이 민간인들에게 물자 도움을 받은 후 나중에 이를 갚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박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서울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몇 년 전에 후진을 위해 용퇴하신 후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소설가 박도 선생님께서 위 글을 보시고 남도부(하준수)관련 귀한 자료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활동하고 계시는 박 선생님은 수 년 전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의 행적을 찾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엘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현지에서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 근현대사 관련 귀한 자료를 다수 입수하셨으며, 나중에 이를 책으로 엮어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오늘 오후 제게 전화를 걸어와 ‘동해남부전구빨치산사령관 남도부’ 명의의 ‘원호증’ 자료 사본을 입수해 갖고 계시다며 메일로 제게 보내주셨는데, 위 사진이 그것입니다. 그 내용은 빨치산 대원들이 민간인들에게 물자 도움을 받은 후 나중에 이를 갚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박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자료 :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67492 (보림재, 정운현님의 블로그)
'내고향'함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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