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정선전씨)

정선전씨 시조 분파조 시향일

운산(雲山) 2013. 6. 2. 19:43

 

정선전씨 시조 분파조 시향일

분파

세순

작호  관직

일시

장소

전씨시조

01세

섭(聶)

환성군  백제개국공신

양 10월 03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산15 (숭인재)

정선전씨득관중시조

08세

선(愃)

정선군  추부시랑

음 09월 15일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서운재)

  제1파 판서공파

25세

수송(守松)

판서공  호부상서

 

 

  제2파 복사공파

28세

길(佶)

복사공  첨의부좌복사

 

 

  제3파 체미헌공파

29세

오륜(五倫)

체미헌공 형조판서

 

 

  제4파 석릉군파

30세

윤장(允藏)

석릉군  문하시중

 음 09월 15일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서운재)

  제5파 상호군파

30세

영부(英富)

상호군

 

 

  제6파 임하군파

41세

응조(應組)

임하군  호조판서

양 11월 첫 일요일 경기도 광명시

  제6파 후석릉군파

42세

룡(龍)

석릉군  형조판서

양 11월 첫 일요일 경기도 광명시

천안전씨

16세

락(樂)

천안군  삼사좌복야 양 05월 05일 광주시 동구 장운동(숭모사)

팔거전씨

25세

원태(元台)

팔거군  예의부윤 음 10월 09일 경북 김천시 감문면 우성리

성산전씨

26세

흥(興)

성산군  판도판서 음 10월 10일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안산리(원모재)

황간전씨

26세

익(翼)

황간군  형부전서

 

임진각 망향제

계림전씨

27세

공식(公植)

계림군  안찰사 음 10월 11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준리

옥천전씨

27세

유(侑)

관성군  판도판서 음 09월 09일 충북 영동군 남천면 대명리(학명재)

옥산전씨

28세

영령(永齡)

옥산군  대장군 음 10월 10일 경남 거창군 남하면 지산리(죽산재)

용궁전씨

28세

방숙(邦淑)

용성부원군  문하시중 음 10월 7일 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소천재)

죽산전씨

28세

한(僴)

죽산군  밀직부사 음 10월 10일 경북 고령군 고령면 본관동(사와재)

성산백전씨

28세

순(順)

성산백  공조판서 음 10월 05일 임진각 망향제

함창전씨

29세

산리(橵里)

함창군  형부전서   경남 함천군 쌍책면 하산리(경앙재)

평강전씨

29세

빈(賓)

평각백  대제학 양 11월 첫 월요일 충북 괴산군 괴산읍 대덕리 (의민사)

기장전씨

30세

영(永)

기장백  형부전서   인천시 강화군 북면 염주동

완산전씨

30세

집(㴕)

완산군  문하사랑평장사 음 10월 10일 임직각 망향제

나성전씨

30세

경(卿)

나성군  성균관제주 양 10월 둘째 일요일  

감천전씨

30세

언(彦)

감천군  찬성사 음 10월 13일  

부여전씨

33세

권(綣)

부여공  군자감정    

 

 

 

 

 

 

 

 

 

 

 

 

 정선 전씨(旌善 全氏)

우리나라의 모든 전씨는 시조 전섭을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烏干), 을음(乙音)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중의 한 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전씨혈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한다.
모든 전씨는 한 할아버지의 혈통이라는 신념으로 대동단합 전국전씨대동보를 편찬하고 정선파 천안파 등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전씨는 역사깊은 명문벌족으로 신라, 고려시대를 통틀어 군(君)에 봉해진 사람이 35명, 정승 12명, 판서 43명을 배출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만 57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전씨 문중에서 특히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등 3형제를 빼놓을수 없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전이갑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한다.

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 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세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백성의 고통 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중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다.
안창호선생과 신민회를 조직,적극적으로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던 전덕기와 의병장 전덕원 등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