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 황진이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이별 없는 사랑이 없다지만, 잦은 이별은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했을까.
소세양과의 30일간의 사랑은 참으로 애틋하다. 황진이와 사랑을 나눈 소세양은
중종 4년에 등과하여 시문에 능했고, 벼슬이 대제학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소세양은 젊어서부터 여색을 밝혔다고 전한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가 절세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소세양은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너희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황진이를 만난 소세양은 30일의 약속으로 동거에 들어갔다. 마침내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소세양은 황진이와 함께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황진이가 누 (樓)에 올라 시 한 수를 읊었다.
그녀의 시 한수는 소세양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며 더 머물렀다고 한다.
친구들은 약속을 어긴 소세양을 인간이 아니라고 놀렸다 하며, 이 때 황진이가 읊었던 시가 바로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이다
황진이 : 조선시대의 시인 ·명기(名妓)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봉별소양곡시 영초월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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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진이의 남자들 >
첫 번째 옆집 總角이다. 황진이를 짝사랑 하여 상사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황진이의 어머니는 그 총각을 절대로 만날 수 없게 하여서 총각은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다가 땅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속저고리를 상여에 덮어주었더니 움직였다 고한다.
황진이는 왜 그 남자가 죽었을까를 생각하며 妓生이 됐다는 말이 있다.
두 번째 남자는 개성 유수 송공이다. 대부인 연회석에 황진이를 초대 하였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황진이가 유명해지게 된다. 황진이는 송공과 그 전부터 함께 지낸 사이라고 한다.
세 번째 남자는 선전관 이사종이다. 사신으로 송도를 지나다가 천사원 냇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아주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그 노래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개성에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데 그 사람인가 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아보게 하였는데 정말 이사종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가 서로 마음속에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러밤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종에게 "내 마땅히 당신과 6년을 살아야 겠소"라고 말하고는 이사종에 집에 3년동안 먹고 살 돈을 가져가서 살고 3년후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대려와 살았으며 6년이 지난 후에는 깨끗이 헤어졌다고 한다. 이걸 보면 황진이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했으며 당당한 여자인지 알 수 있다. 계약결혼의 시초다.
네 번째 남자는 양곡 소세양이다. 그 남자는 "남자가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끗이 끝내겠다. 라고 큰소리 쳤다고 한다. 황진이와 30일을 지낸 후 황진이가 송별 소양곡을 불렀다. 그걸 듣고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황진이와 함께 몇 일을 더 살았다고 한다.
다섯 번째 남자는 왕족 벽계수이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안아 고민하다가 친구인 이달에게 물어 꾀를 내어 황진이 집근처 정자에서 노래 한곡을 크게 부르고 황진이가 따라와서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갔다고 한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망공산할제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읊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벽계수가 뒤돌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라 풍유랑이라 라고 말하고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벽계수 낙마곡으로도 유명하다.
여섯 번째 남자는 이생이다.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유랑을 하고 싶어 하여 동행을 청해서 함께 금강산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갈 때 이생이 먹을 것을 짊어지고 갔는데 여행도중 다 떨어져서 곳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황진이가 몸을 팔아 음식을 얻었다고 한다. 여행이 끝나고 미련도 없이 헤어졌다고 한다.
일곱 번째 남자는 지족선사다. 그는 면벽수련 30년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용모가 빼어났던지 면벽수련 30년을 깨고 파계승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마지막 남자 여덟 번째는 황진이가 정말로 사랑한 서경덕이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서경덕에게 가서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해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됐고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 개를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한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 로다
주야에 흐르나니 옛 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이와 같아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
녹수는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이 그리워 울어 예어 가는가
서경덕을 위하여 지은 시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혀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송세양을 위하여 지은 시
황진이는 남성위주의 시대를 외려 휘저었고
섹스는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으나 헤프지 않았으며
시화에 능하고 풍류를 알아 서양 및 중국의 미녀가
단순이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女人이었다.
그래서 후일의 남자들도 그를 그리워하며
“ 자는가? 누웠는가?”고 그를 흠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