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언절구 (七言絶句) / 여러가지 詩
1. 唐人 戴幼公의 詩
山下孤城月上遲 (산하고성월상지) 산 아래 孤城은 달이 이찌 이렇게도 늦게 뜨나요,
相留一醉本無期 (상류일취본무기) 서로 만나 한번 술에 취할 기약조차 하기 어렵다오.
明年此夕遊何處 (명년차석유하처) 명년 오늘은 어느 곳에서 놀거나,
縱有淸光知對誰 (종유청광지대수) 달밝은 날, 누구와 함께 어울릴지 몰라라.
========================================================================
2. 高適(고적)의 除夜作(제야작)
旅館寒燈獨不眠 (여관한등독불면) 여관의 차디찬 등불에 잠 못 이루는
客心何事轉悽然 (객심하사전처연) 나그네의 마음이 어찌 이리 처량한고
故鄕今夜思千里 (고향금야사천리) 오늘 밤 고향은 천리 길인데
霜明朝又一年 (상빈명조우일년) 내일 아침이면 흰머리가 또 한 해를 맞네
위 시는 고적이 섣달 그믐날에 고향의 식구를 그리며 지은 시다. 제야(除夜)는 섣달 그믐날 밤으로 제석(除夕)이라고도 한다. 상빈(霜偸)은 서리 같이 하얀 머리카락을 일컫는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즐거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의 이별로 도리어 처량해지는 자신을 주체할 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향수를 직접 서술하지 않고, 고향의 식구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으로 설정하여 자신의 간절한 향수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고 하겠다.
위 시의 작자인 당(唐)나라 시인 고적(高適)을 떠올리면 곧 지금의 티벳이 생각난다. 아직도 원시적인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어 누구나 한번쯤은 가고 싶어 하는 땅 티벳.
고적은 753년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였던 명장 가서한(哥舒翰)의 막부(幕府)에 들어가 현재의 티벳 지역에 있었던 토번(吐蕃)이라는 나라를 격파하여 구곡(九曲)이라는 지역을 탈환하는 전투를 직접 목도하게 되고, 그것을 구곡사(九曲詞)라는 시로 칭송을 한 바 있다.
구곡이란 지역은 지금의 칭하이성(靑海省) 바옌시엔(巴燕縣) 일대로 수초가 무성하여 목축을 하기에 적당했는데, 당과 토번은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각자의 통치 하에 두려고 자주 충돌하였다. 710년 당으로부터 이곳을 차지한 토번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자주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단절시켜서 안서사진(安西 四鎭)을 고립시키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당을 더욱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753년에 이르러서야 가서한 장군이 토번에게 빼앗겼던 구곡을 모두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
3. 王昌齡(왕창령)의 采蓮曲(채연곡)
荷葉羅裙一色裁 (하엽라군일색재) 연잎과 비단 치마 같은 색인데
芙蓉向臉兩邊開 (부용향검양변개) 연꽃은 두 뺨 향하여 피어있구나
亂入池中看不見 (난입지중간불견) 못 속에 섞여 있어 보아도 보이지 않다
聞歌始覺有人來 (문가시각유인래) 노래 소리를 듣고야 사람 있는 줄 알았네
王昌齡 : 중국 당나라의 시인(698~755). 자는 소백(少伯). 청신한 착상으로 칠언 절구에 뛰어나
이백과 쌍벽을 이루었으나 안녹산의 난 때에 피살되었다.
작품에 <출새(出塞)>,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이 있다.
============================================================
4. 江村卽事 (강촌즉사)
- 司空曙 (사공서) 740~790 -
罷釣歸來不繫船 (파조귀래불계선) 낚시하고 돌아와 배도 매지 않고
江村月落正堪眠 (강촌월락정감면) 달도 저문 강촌에서 잠이 들었네
縱然一夜風吹去 (종연일야풍취거) 밤새 바람이 제멋대로 분다 해도
只在蘆花淺水邊 (지재로화천수변) 배야 갈대꽃이 핀 물가에 있겠지
=============================================================
5. 塞上聞吹笛(새상문취적) - 고적(高適)
변방에서 피리소리 들으며
雪淨胡天牧馬歸 (설정호천목마귀) : 눈 개인 오랑캐 하늘에 목마가 돌아오니
月明羌笛戍樓間 (월명강적수루간) : 달은 밝은데 오랑캐 피리소리 수루에서 들린다.
借問梅花何處落 (차문매화하처락) : 묻노니, 매화는 어느 곳에 지는가
風吹一夜滿關山 (풍취일야만관산) : 바람 불어 하룻 밤 동안 관산에 가득하다
=================================================================
6. 해석못했음 (귀하가 연구해 보시기 바람)
翠嶺香臺出半天,萬家煙樹滿晴川。
諸僧近住不相識,坐聽微鐘記往年。
===============================================================
7. 한식사상작(寒食汜上作)-왕유(王維)
한식날 범강에서 짓다-왕유(王維)
廣武城邊逢暮春 (광무성변봉모춘) : 광무성 가까운 곳에서 늦은 봄을 만나고
汶陽歸客변沾巾 (문양귀객변첨건) : 문양으로 떠나는 손님이 눈물로
손수건을 적신다.
落花寂寂啼山鳥 (낙화적적제산조) : 꽃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산에는 불여귀
(즉, 두견새, 자규)가 운다
楊柳菁菁渡水人 (양류청청도수인) : 버드나무 가지는 푸른데 손님은
강물을 건너고 있다
한식사상작(寒食汜上作)-왕유(王維)
한식날 범강에서 짓다-왕유(王維)
廣武城邊逢暮春(광무성변봉모춘) : 광무성 변두리서, 늦은 봄을 맞는데
汶陽歸客淚沾巾(문양귀객누첨건) : 문양 가는 나그네, 눈물이 손수건 적신다.
落花寂寂啼山鳥(낙화적적제산조) : 지는 꽃 적적한데, 산에서 우는 새 있고
楊柳靑靑渡水人(양류청청도수인) : 버드나무 푸르고 푸른데, 물 건너는 사람 있다.
====================================================================
8. 이창조댁야음(李倉曹宅夜飮)-왕창령(王昌齡)
霜天留飮故情歡 (상천류음고정환) : 서리 내린 밤 술 마시며 옛 정 즐기니
銀燭金爐夜衣寒 (은촉금려야불한) : 은촛대 금화로에 밤이 추운 줄을 모르노라
欲問吳江別來意 (약문오강별래의) : 오강에서 이별한 마음 묻는다면
靑山明月夢中看 (청산명월몽중간) : 푸른 산 밝은 달을 꿈 속에서 보았다네
王昌齡(왕창령 : 약698-757) :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소백(少伯).
변새시(邊塞詩)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났음.
9. 偶吟(우음)
- 虛應堂(허응당;보우선사) -
松鳴自寂風初定(송명자적풍초정)
山氣蒸暝雨欲來(산기증명우욕래)
獨坐忽驚香撲鼻(독좌홀경향박비)
巖花無數繞軒開(암화무수요헌개)
우연히 읊다
바람 멋자 소나무 울림소리 고요하고
산기운 찌는 듯 무덥고 어두워져 비가 내릴 듯
홀로 앉으니 갑자기 놀라워라, 향기가 코를 찌르네
바위의 꽃들이 무수히 난간을 둘러싸고 피어난다.
虛應堂(허응당) 普雨大師 (보우대사) (1509∼1565)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보우는 법명이다.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뒤 금강산일대의 장안사 (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精進) 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얻었고, 그밖에도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 <주역>도 공부하였다.
당시 그를 지도해준 스 승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러가지 문헌을 종합해보 면,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의 특별한 사 귐으로 인해 문정대비 (文定大妃)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12월 봉은사(奉恩寺)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 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 (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능침(陵寢)에 침입하 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 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에는 방(榜) 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 다. 이러한 일은 조선시대 와서 처음 있는 일로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이 문제가 조정에까지 비화되었다.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1549년 9월 20일에 성균 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은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강력한 건의를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문정대비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문정대비·보우와 유생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다. 이 후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 (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선교 양종 을 부활하라는 문정대비의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그러나 보 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 었다. 1565년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 로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이이(李 珥)가 <논요승보우소 (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것을 주장함에 따라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12일에서 7월 28일 사이에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 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0월 15일이 었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 (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3권과 <나암잡저(懶庵雜著)>1권,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